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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傳統酒 막걸리와 함께하는 구수한 이야기(칼럼 이 동석, 2010년 11월 12일).

활력의 여가생활/Digital 칼럼철

by Digitalnz 2010. 11. 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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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傳統酒 막걸리와 함께하는 구수한 이야기(칼럼 이 동석, 2010년 11월 12일).
(2010년 대한민국 ROTC 10월 중앙 회보지 기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민의 술이며 또한 선조들이 즐기며 애용했던 막걸리 전통 사극에서 보면 ‘주모 여기 탁주 한잔 내오시오’ 할 때 그 탁주가 막걸리를 지칭했으며 인기프로 1박 2일 코너에서 작년에 강 호동이 바가지로 퍼마신 술이 바로 이 막걸리이다.

찹쌀, 보리, 밀 등을 쩌서 식힌 다음 누룩을 썩어 발효시킨 것을 그대로 걸러 냈다 하여 즉, ‘막 걸러낸 술’이라고 하여 유래된 막걸리는 자료에 의하면, 최초 등장한 것은 고려 때부터인데 문인 이 달충(李 達衷)이 자작시에서 ‘뚝배기 질그릇에 허연 막걸리’라는 구절에서 최초로 표현이 되었다고 한다. 짐작컨대 이때부터 막걸리가 애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표적인 막걸리는 이화주(梨花酒)가 있었는데 막걸리용 누룩을 배꽃이 필 무렵에 만들었다고 하여서 이를 이화주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막걸리 한잔 마시는데 배꽃이 필 무렵까지 1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우리 선조들도 어지간한 인내가 있어야 막걸리 한잔 먹을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막걸리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한데 탁주(濁酒), 농주(農酒), 재주(滓酒), 회주(灰酒) 등으로 불리어져 왔고 또한 빛깔이 뜬 물처럼 희고 탁해야 하며 알코올 농도 6 -7도 성분으로 오미(五味)(시고, 떫고, 달고, 짜고, 쓴맛)가 고루 갖추고 있어야 최고의 막걸리라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막걸리는 땀 흘리고 일한 우리의 일상 농경문화에서  옛 농부들의 갈등 해소용으로 최고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한, 우리에겐 온 종일 들녘에서 일마치고 들어온 아버님이 술 한주전자 사오라면 삼거리나 오거리 비포장도로 버스 정류장에 허스름 하게 위치한 전빵(오늘날 구멍가게를 보통 사투리로 지칭)에 가서 막걸리 한 주전자 사들고 집으로 오다가 자갈길 신작로(시골길 도로) 어딘가에 우뚝 솟은 돌부리에 넘어져 엎질러지고 반 남은  주전자 들고 엉엉 울며 집 대문에 들어섰던 그 옛날 추억 거리담도 막걸리 역사만큼이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민들의 밥이자 술이며 음료로서 오랫동안 함께한 막걸리는 70 - 80년대 우리 세대에겐 한번쯤 대학가 앞 왕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눌러 앉아서 정에 취하고 맛에 취해서 ‘이모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 추가 요’ 라고 외치면 여기 저기 부딪쳐서 찌그러진 양철 주전자에 우리 어머님 같은 정만큼이나 철철 넘치도록 듬뿍 담아서 날라주던 막걸리. 안주 먹는 것도 잊어  버리고 실컷 마셨던 우리 시절, 대학 학창시절 추억 거리담도 가지고 있으리라.

 

요즈음, 서민들의 전통술 막걸리가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이유는 건강 음료로 소개되면서 부터라고 하는 데 감칠 맛 나는 막걸리(6-7 도)에는 첫째, 유산균 함유량이 일반 요구르트(65ml) 100병 정도와 맞먹는 양을 함유하고 있어서 섭취시 장에서 염증이나 암을 일으키는 유해 세균을 파괴하고 면역력을 강화한다고 한다. 

 

둘째는 비타민 E 함유량인데 비타민 E는 중년 남성들에게 도움이 영양소로 피부 완화와 피부재생, 시력 증진 효과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셋째는 식이 섬유인데 이는 대장 운동을 활발히 하게 해서 변비 예방은 물론 심혈관 질환에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감히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막걸리 열풍 짐작이 간다. 
 
이러한 막걸리는 ‘막걸리 기행’이라는 책자를 쓴 정 은숙에 의하면 막걸리 애호가들에게 급수가 있었으니 막걸리를 마셨는데 혀에 착착 감기는 자는 초보자라 칭했으며, 밥 대신 막걸리를 마셔도 아무렇지도 않는 증상을 보인다면 중급자이며, 그리고 막걸리 만드는 비법을 꿰뚫고 있어 막걸리 만드는 것을 시도해 본 사람을 상급자라고 하였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영원 하리만큼 길게 생각되어지는 저 멀리 아득한 바다의 수평선 같은 인생. 이러한 인생의 긴 장거리 항해에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이 때론 힘들고, 지치고, 고독을 느끼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농주 한 잔을 벗 삼아 해학과 지혜로서 이러한 것을 모두 떨쳐 버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잊어버리고 했던 것처럼 오늘날과 같은 다소 각박한 세상에 사는 우리로선 한번쯤 가까운 지인들과 추억 어린 기차를 타고 시외 외곽에 자리 잡은 허스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서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함께 가져 보는 것도 현대를 사는 우리의 지혜로운 삶의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필자 : ldsci@hanmail.net(오클랜드 남부 파파쿠라 거주)
 
1) 참고자료 : 막걸리 기행(정 은숙), 막걸리 인생, 막걸리를 이야기 하다(성 성재).
2) 이 달충(李 達衷)(1309 - 1385)
고려 시대의 유학자로서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좨주(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 1366년(공민왕 15)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의 전횡시절에 그에게 주색(酒色)을 삼가라고 공석에서 직언하여 파면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주살된 후 다시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85년(우왕 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에 《제정집(霽亭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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