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탄 - 90년대 대기업 퇴사하고 개인 사업 안정기에 들자 스키 타기 시작해서 뉴질랜드 이주 후 스키 이야기
제2탄 - 90년대 대기업 퇴사하고 개인 사업 안정기에 들자 스키 타기 시작해서 뉴질랜드 이주 후 스키 이야기
옛전 대기업에서의 직장생활 다들 똑 같겠지만, 일반적으로 회사란 개인이 일을 잘 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이 움직여서 돌아간다.
즉, 지금은 다르겠지만 나 혼자 잘 한다고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물고 물려서 모두 잘 움직여져야 효율적인 이익이 창출되곤 한다.
그래서 매일 회의니 협조니 워크샵 등을 하는데 이런 시스템이 어떤 사람은 죽어라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나 몰라라 하니 업무성과가 개의치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1992년경 대기업 잘 나가던 반도체 직장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즉시 꿈에 그리던 개인사업을 시작하였다.
삶의 터전을 충주로 옮겨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지 2년 정도 지나니 사업은 어느 정도 안정 괘도에 올랐다.
먼저 차도 대형 고급차로 바꾸고 여유가 생기니 내 사업외에 사회 대외활동(신협 감사, 로타리 클럽, 청소년 교도소 교사 봉사) 같은 것도 병행했다.
속칭 고급 대형 검은 승용차에 넥타이 메고 폼 잡고 외출하는 날들이 더러 많았다.
사업 번창 이야기를 좀 더 이야기 하면 당시 나의 월 수익은 내가 다녔던 당시 대기업 중견사원일 때 받았던 월급의 4배 정도였고 사업은 1년 단위 결산해서 이익이 나니 매년 건물이나 땅 덩어리 하나씩은 샀던 것 같다.
그러니 당시 나의 성공적인 사업번창을 옛 직장동료들은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정말 고국에서 나의 최고의 전성기였고 기회였던 것 같다.
특히, 이처럼 사업의 번창과 더불어 1994년부터는 주중에는 직원들과 열심히 일하고 개인적으로는 사회 활동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말에는 어김없이 가족들과 함께 레져생활을 즐겼는데...
특히, 겨울시즌 주말에는 토요일 오전 사무실 업무을 일찍 종료하고 수안보 스키장으로 주로 스키를 타러 갔고 여기 외에도 무주, 용평, 양지 스키장으로 원정까지 돌며 스키도 많이 타러다녔다.
그리고 자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에게 스키타기란 스키자세가 중요한 것이 가족 모두가 그저 같이하는 운동이라 슬로프에서 넘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내려오는 일종의 "관광스키" 개념의 레져활동이었다.
그래서 우리가족 모두는 지난 날 고국에서의 이런 스키추억은 지금도 잊지않고 가슴속 깊이 고스란히 다 간직하고 있다.
특히, 지금 여기서 30대 중년으로서 어느 덫 사회인으로 우뚝서 있는 우리 막둥이, 그는 3살적부터 내가 스키 신겨서 함께 리프트 타고 올라가 슬로프를 내려오곤 했었다(이제 세월이 흘러 2027년 4세가 되는 우리 손자와 함께 스키장 출입이 예상됨).
이렇게 다소 여유로운 생활을 이어가던 중 고국에서 1990년대말 갑자기 유학붐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도 여기에 편승하여 애들(중1, 고1)을 2년여 엄마와 함께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냈는데 솔직히 나에게는 가족을 그리는 기러기 아빠생활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물론, 당시 유학붐도 있었지만 중1인 작은애가 학년 600명 중 최상위 석차내에서 있어서 유학을 보내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드물게 2년여 유학 보내면서 지금은 유학생 신분은 주택을 구입할 수 없지만 우리는 당시 집까지 직접 구매해서 유학을 시켰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의 2년여 가족들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집 팔고 귀국을 앞둔 싯점에도 고국에서 나는 가족없는 기러기 아빠 생활에 외로움에 지쳐 친구들과 잦은 음주 등 다소 방탄한 생활이 다소 매일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다쳐 올 날이 오고 말았다. 경찰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서 거금의 벌금(200만원)에 면허까지 취소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뉴질랜드에 구매한 집까지 팔고 자금까지 고국에 역송금이 완료된 상태였는데 나는 그야말로 진퇴양란이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다행스럽게도 기러기 생활중 뉴질랜드에 들락거리며 운전을 해야 하였기에 뉴질랜드 현지 면허가 필요해서 취득한 면허증이 있었고 또한 집사람이 애들 학교보내고 할 일이 없었는데 가게를 하는 지인이 도와달라고 해서 틈틈이 한 두 시간씩 알바를 했었는데 사정이 그러하면 가게를 인수할 의향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집사람과 상의 끝에 고국으로의 귀국을 포기하고 당시 집 한 채 자금을 다시 뉴질랜드로 다시 역송금해서 가게를 인수했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잘 나가던 고국의 사업을 일시에 접고 사업비자를 받고 고국에 건물 한 채만 남기고 모든 걸 정리해서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말 뜻하지 않는 이국에서의 이민생활 시작이었다.
물론, 당시 우리는 여기 뉴질랜드에 영주할 의사도 없었으니 영주권 생각도 안했고 학생비자 등 일시 체류만 생각했는데 들어와 실상을 보니 장기 거주시 영주권 없이는 애들학비 등 현지 여건이 감당할 상황이 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부랴부랴 영주권 취득할 방법을 알아보니 영주권 막주던 그 좋은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우리 앞에는 영주권 취득을 위한 주신청자 필수 영어점수라는 험난한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 우리 뉴질랜드 바로 입국 이전(1995 - 2000년)만 하더라도 대졸이상 학력에 사업경력만 있으면 영어점수 필요없이 누구에게나 사전에 영주권을 주어 모국에서 짐을 싸서 합법적으로 들어오도록 했는데 세계의 수 많은 이민자들이 일시에 파도처럼 몰려오니 자국민 보호를 위해서 일시에 이민법을 닫아버리고 있던 그 싯점이었다.
나는 어려운 시기에 좋게 생각하면 억세게 운 좋게 시기적으로 맞었다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영어와 함께 영주권이라는 문제가 내 앞에 놓일 줄은 또 생각도 못했다.
특히, 고국에서 우리는 학창시절 영어를 TOEIC 이나 TOEFL 만을 접했고 국내 직장에서도 입사할 때나 진급시 이 성적만을 요구했었는데 낯선 땅 이국에서 팔자에 없는 낯선 IELTS 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도 정규 대학원에서 원서로 공부했던 놈인데 그 까짓 것 하고 이빨 악물고 3개월여 공부하니 IELTS 5.0 PASS 라는 합격의 영광을 시험도전 첫 번만에 2002년 받았다.
당시 비자 주신청자인 나는 편법이 아니고서는 영어점수 없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법으로는 없도록 이민법이 이미 강화된 상태였다.
내가 영어시험 합격을 못하면 2,3년 후에 우리 가족은 보타리 싸서 재발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거나 아니면 불법 체류상태로 여기에 눌러 앉던지 아니면 미국으로 건너가던지 선택의 여지가 없던 시절이라 당시 영어 패스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교민들 사이에 대단했으니 그 기쁨 어디에 형언할 수 없었다.
누구나 당시에 생소한 IELTS 영어시험은 또한 도전 실폐시 일정시간이 흘러야 시험자격이 주어지고 응시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모두들 힘들어들 했고 결국, 수 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실폐시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눈물을 머금고 고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 점수 얻으면 속칭 당시 이민사회는 고시 패스한 사람이라고들 했다.
그러니 나는 이 시험 패스하고 가족들에게 고국에서 좋지못한 나의 음주운전 꼬리표가 뉴질랜드 재이주라는 좋은 상황으로 반전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마음의 여유도 생기면서 뉴질랜드에서도 서광의 햋볕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애들도 보답하듯이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영어점수를 큰애는 IELTS Accademy 6.5, 작은애는 무려 100점에 가까운 IELTS 8.5 점수를 받아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다.
본래 주신청자외 가족들은 IELTS 합격점수가 없으면 지금은 얼마인지 모르지만 영어교육 선납비로 이민성에 거금 6,000불(한화 당시 300만원/환율 509원)을 예치해야 했다. 우리 가족들 중 유일하게 집사람만 돈으로 때웠다.
날로 성장하는 비즈니스와 함께 영어점수도 있으니 영주권을 어떻게 받느냐가 문제이지 즉, 투자이민(100만불)으로 받느냐 아니면 현 비즈니스 함께 영어점수인 사업이민으로 받을 것인지 고민 아닌 행복한 고민을 했다.
그래서 결론은 고국 재산 서서히 정리하면서 현 비즈니스 운영으로 영주권을 받고자 이민성에 신청을 진행했는데 어느날 이민성에서 기각이 되었다고 편지가 왔다. 이런 날벼락 아닌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획득한 3년 유효한 IELTS 영어점수가 있으니 고국에 짐 싸가지고 귀국할 걱정은 안했으나 문제는 혹시나 영주권 취득이 지연되면 애들 학비문제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하여튼 기각 사유를 자세히 읽어보니 영어점수가 있는데 영어점수가 없고, 우리 비즈니스가 크고 좋은데 우리만 이익 창출하고 뉴질랜드에 고용창출 기여도가 부족하다는 등 참 말로 안되는 이민성 기각편지였다.
그래서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우리의 매출 및 성장과정 기여도 등을 고국 대학원 졸업 논문 준비하듯이 내가 직접 엑셀로 그래프까지 몇 일에 걸쳐서 작성한 후 내 영어점수와 함께 항소했더니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영주권 접수 바로 다음날 승인 영주권을 이민성에서 이메일로 받았다.
비록, 두 번째 영주권 신청 접수 후 받은 영주권이지만 아마 뉴질랜드 이민자 중에서 영주권 접수 후 최단 시일인 접수 다음날 하루만에 영주권 승인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뉴질랜드에서의 삶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그래도 만약 고국에 돌아가더라도 살 집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남겨 놓았던 복합 상가건물을 월세로 놓기 위해 한국 우리집 3층 방 한 컷에 남겨놓은 가구들을 정리해서 몇 년간 쳐넣어 놓았던 중요한 물건들만 콘테이너가 아닌 몇 개의 박스로 만들어 배편으로 뉴질랜드로 가져 들어왔다.
이 때 가족들의 스키장비는 다 버리고 내 장비는 2번씩이라 바꾼 속칭 당시 다소 비싼 장비라 버리기도 아깝기도 해서 참 어렵게 뉴질랜드까지 공수해 들여왔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지만 이곳 뉴질랜드 이주 후 초기 정착과정이 있기에 안정되기까지 살기 바뻐서 레져생활이라 해봐야 주말 트램핑이나 틈나는데로 잠깐 골프장 들어가서 골프나 조금 치는 생활이지 오클랜드에서 남섬이나 루아페후까지 위치한 스키장까지 원정 스키 타기란 당시에는 쉽지가 안해서 스키 탈 엄두는 솔직히 없어서 스키장비는 그냥 창고에 모셔놓고 세월만 보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여기 사업을 정리하니 이민생활 수 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클랜드에서의 생활환경도 한 번 바꿀겸 해서 우리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생각되는 남섬 퀸스타운으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당시 우리는 북섬에서 남섬 이사라는 결단을 내리고 3번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 집을 구하고 2014년 2월경 퀸스타운으로 콘테이너에 어렵게 이삿짐을 싸서 거금 들여가며 이사를 마쳤다.
이사 첫해 2014년에는 짐 정리가 끝난 후 우리가 원했던 밀포드 싸운드 트램핑 등 워킹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겨울 첫시즌에는 집에 있으면 추워서 승용차로 코로넷, 리마 커블스 스키장 올라가서 따뜻한 클럽하우스에 앉아서 차 마시면서 스키장 구경이나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2015년, 그동안 공부를 끝내고 사회에 우뚝 선 애들이 생일선물로 스키장 리프트권을 선물해 주어서 비로소 이 곳에서 본격 스키장을 출입하게 된다.
당시 스키장 출입 전에 스키판의 대세는 알파인 스키에서 카빙스키로 바뀌고 있었는데 스키장 출입을 못했으니 그 것도 모르고 아무튼 보관해오던 고국에서 1996년경 구입했던 내 장비들을 체크해서 챙기고 집사람은 세컨샵에서 연습용 카빙스키를 세트로 구입해서 퀸스타운 우리집 뒷산 코로넷 스키장에 처음 올라갔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코로넷 스키장 클럽 하우스에 들어갔는데 상온에 십 수년 보관했던 내 스키 부츠를 꺼내서 신을려고 하는 찰라에 부츠가 바사삭 깨졌다. 장시간 상온보관으로 부식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하여튼 클럽 하우스에서 부츠만 빌려서 둘 다 헬멧도 착용 안하고 엉성한 스키복장에 초급 리프트에 올라 슬로프를 타니 그래도 옛날 고국에서 스키탔던 가락은 있어서 엉덩이 턴으로 슬로프에서 미끄러 너머지지는 않고 내려는 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당시에는 뉴질랜드 대부분 스키장 슬로프는 한산하기에 내려오면 바로 리프트 탑승을 초급코스 적응을 거쳐 중상급자 코스로 이동해서 카빙스키로 막스키 자세(일명, 압구정 지랄턴)로 타고 다녔다.
속칭, 나는 스키에서 헌법 1조인 카빙 엣지세우는 기술스킹을 타려고 무직히 노력하면서 올라다녔지만 당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슬로프를 타고 다녔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다녔음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즉, 카빙스키를 타려면 "골프에서 백돌이를 면하기 위해서는 순서에 준해서 항상 익혀진 동일한 자세'가 나와야 하는데 카빙스키에 대한 이해력도 부족했지만 급경사 슬로프 내려오기 급급하니 설질에 익혀진 동일한 자세가 나올리 만무했던 그 시절의 나의 스킹 수준이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이 처럼 뉴질랜드에서 스키는 본격적으로 2015년 퀸스타운에서 타기 시작하여 2019년 오클랜드에 다시 올라와 코로라 봉쇄와 개인사가 있었던 어느 해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년 시즌에는 루아페후에서 필드스킹을, 비시즌에는 매주 3번 이상 우리동네 실내스키장에 들어가 스키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 동안 뉴질랜드에서의 나의 스킹은 죽어도 원 없을 만큼 참 많이도 탔고, 비록 지금도 시니어로 접어들어 체력은 딸리지만 스키라는 운동을 가까이 하고 있다.
스키를 이 처럼 즐기다보니 그 동안 스키에 필요한 각종 장비에 투자된 금액도 웬만한 소형 승용차 한 대이상 구입할 정도는 된 것 같으니 앞으로도 장비가 아까워서도 스키장 출입을 안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스키란 지난날 고국에서나 여기에서나 많이 타고 많이 투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레슨이나 이론공부도 좀 더 깊이 연구해가면서 기술스키를 접했더라면 좀 더 카빙 터득하는 시간을 훨씬 줄어 주었을텐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많다.
아무튼 그 옛적 장비개념도 없이 무지로 다녔던 추억의 스킹시절을 돌아보면서 모든 운동은 어느 정도 정상 괘도에 오르면 장비도 업 그레이드 해가면서 타야 고생을 덜하다는 진리까지 터득했으니 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스키 이야기 하면 이제 썰은 풀 정도는 되어있다.
특히, 스키는 안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필히 장비의 업 그레이드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나이 들어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중의 하나라는 것으로 추억의 스키 이야기 글을 맺고자 한다(2025년 3월 중순 각색).
제 1탄 - 1980년대 스키를 알게 한 3번째 부임지 “조쟁이 마을”과 “진부령” 이야기. (0) | 2021.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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