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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눈물(글 : 자주민보 유 태영).

오세아니아 중심 NZ/뉴질랜드 소개

by Digitalnz 2003. 8. 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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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눈물(글 : 자주민보 유 태영).

마오리족 땅 빼앗은 “와이탕기 조약”과 마오리 전쟁.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은 누구인가? 마오리족은 본래 폴리네시아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AD 700-800년경에 카누를 타고 처음으로 오스트라시아 지역에 속하는 뉴질랜드 섬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여 1000년 세월을 살았다. 그곳에 정착한 폴리네시안들은 약 1000년 동안 마오리 원주민 부족사회를 형성하면서 평화롭게 살아 온 독특한 원주민 집단이었이다. 이들은 타조와 비슷한 모아를 즐겨 잡아먹고 살았음으로 “모아사냥꾼”이라고 불 여진 것이 유래가 되여 그들을 마오리족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뉴질랜드에 정착한 마오리족은 독특한 사고방식과 그들의 행동양식은 항상 선조를 기억하고 존경하면서 동족과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땅의 주인으로서 집단적 일체감을 가지는데 있어서 그들의 삶의 독특한 문화적 지표를 삼고 있다. 그럼으로 마오리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땅을 보호하는 과제이다. 마오리족이 동족의 땅으로 규정된 토지는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땅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땅을 남에게 함부로 넘겨주는 행위는 선조에 대한 반역행위로 여기고 강력하게 규탄하는 전통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마오리족의 땅을 중요시하는 전통은 1600년대에 이르러서 유럽인들이 마오리 인들의 땅을 발견하고 상륙하게 됨으로 인하여 마오리 원주민의 땅을 중요시하는 오래된 전통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769년에 영국의 해양탐험가로 유명한 Captain James Cook이 뉴질랜드에 상륙하여 침략의 선봉자와 식민지의 개척자가 되고 있었다. 1814년에는 영국 선교회의 런던 미션 소사이어티(London Mission Society)는 대량의 기독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선교사들이 뉴질랜드를 남태평양의 중요한 선교의 거점으로 삼고 대대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뉴질랜드가 영국에 널리 소개됨으로 인하여 고래잡이와 원시림 목재의 벌채 등으로 많은 영국인들이 뉴질랜드에 밀려 왔으며 영국인들은 순진한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탈취하고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잔인한 행동을 감행했다.

뉴질랜드에 밀려온 영국인들 중에는 영국에서 범죄인으로 감옥살이를 한 죄수들이 많이 있었다. 이 죄수 집단의 영국인들은 뉴질랜드에 총포를 가지고 왔을 뿐만아니라 원주민들에게 총포를 판매하여 원주민 부족들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1769년에 James Cook이 처음 뉴질랜드에 상륙한 후부터 6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1837년에 이르러서 뉴질랜드는 그 당시 남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무질서하고 위험한 위기에 처한 섬 나라가 되고 있었다.

뉴질랜드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또 하나 다른 이유는 그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해전에서 막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남태평양에서 무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데 있다. 외세에 공포를 느끼고 있던 마오리 추장들은 프랑스의 침략을 받는 것 보다는 차라리 영국의 보호를 받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31년에 마오리 추장 13명은 영국에 요청하여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마오리 부족을 지 켜달라고 요청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0년 영국은 총 한방도 쏘지 않고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는데 완전히 성공했다. 하지만 영국은 뉴질랜드를 합법적으로 식민지로 삼은 데 대하여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영국이 진짜 요구하는 것은 마오리 부족의 민중들이 땅을 조상의 유산으로 생각하면서 땅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는 전통적인 “땅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영국의 진짜 속셈이었다. 마오리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땅의 소유권”을 완전히 빼 앗는 것이 영국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1. 영국이 뉴질랜드 땅을 매수하는 와이탕기 조약

1840년에 영국의 해군장교 윌리엄 홉슨 (William Hobson)이 영국의 총독으로 뉴질랜드에 왔다. 홉슨 총독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여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모든 법적 절차를 완결했다. 홉슨 총독은 1840년 2월 6일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북섬에 있는 와이탕기 (Waitangi)로 소집하여 이른바 “와이탕기 조약”을 맺었다. 이 “와이탕기 조약”은 사실상 뉴질랜드의 식민지에 대한 합법적 절차였으며 또한 마오리 부족의 “땅 문서” 를 영국에게 거저 넘겨주는 조약이었다. “와이탕기 조약”의 전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마오리의 모든 추장들은 그들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이양한다.

제2조: 영국 여왕은 추장들과 부족들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토지를 매도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왕의 대리인과 협의하여 여왕에게 먼저 토지의 구입권을 양도한다.

제3조: 영국 여왕은 뉴질랜드의 마오리 원주민들에게 왕실의 보호를 확장하여 영국민의 권리를 부여한다.

위의 “와이탕기 조약”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극히 기만적 조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명의 추장들은 모두 다 이 조약에 서명을 했다. 뿐만 아니라 홉슨 총독은 그후 7개월 동안 영국의 관리들이 전국을 돌게 지시하여 500명의 부락 추장들이 “와이탕기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39명의 추장들이 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사실에 있어서 “와이탕기 조약”은 아주 짧고 간단하게 작성되여 있지만 그 속에는 영국의 침략적 야욕이 깊숙히 숨어 있음으로 논쟁과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었다. 이 조약은 마오리 원주민에게 이익을 약속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영국인들에게는 마음대로 마오리의 땅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속임수 조약이었다. 영국이 속임수로 맺은 “와이탕기 조약”이 불씨가 되어 “마오리 전쟁”이 시작됐다.


2. 마오리 전쟁의 비극

마오리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마오리 전쟁은 영국 홉슨 총독의 속임수에 넘어가 “와이탕기 조약”에 서명을 했던 46명의 추장들 중에서 호네 호케 추장이 영국의 간교한 토지강탈 정책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 그 불씨가 되었다. 호네 호케 추장은 영국의 국기가 마오이 부족의 땅에서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깃대를 꺾고 영국 국기를 찢어버렸다. 영국 군인이 깃대를 또 다시 세우고 영국 국기를 또 매달자 호네 호키 추장은 굴복하지 않고 깃대를 꺾고 영국 국기를 찢는 것을 계속 했다. 이렇게 하는 행동을 4번이나 반복했다. 홉슨 총독은 100파운드 현상금을 걸고 누구던지 호네 호케 추장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100파운드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발표했다.

호네 호케 추장은 역공으로 역시 100파운드를 걸고 누구던지 홉슨 총독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100파운드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당당히 발표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두 사람의 머리를 가져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정세속에서 뉴질랜드는 두 개의 민족이 함께 동거하는 국가의 성격을 지니면서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영국의 “뉴질랜드 토지회사”는 지나친 토지매수를 감행하여 일부 추장들이 토지분쟁에 얽히게 되었다. 마오리 부족 민족운동가들은 토지판매를 일절 중지 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킹 무브먼트(King Movement)’를 창설하여 땅을 지키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이런 와중에, 1840년 2월 6일에 영국의 속임수에 넘어가 “와이팅기 조약”을 맺은지 어느덧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1860년에 이르러서 영국 식민지 종주국 영국의 군대와 마오리 땅을 끝까지 지키기 위하여 최후의 총력을 집중시킨 마오리 군은 드디어 이른바 “마오리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마오리 전쟁”이 뉴질랜드의 타라나키 지방의 작은 마을 와이타라에서 전쟁이 처음 시작됐기 때문에 일명 “타라나키 토지전쟁” 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오리 전쟁”은 1860년에 시작하여 1872년까지 12년 동안 치열하게 계속 됐다. 영국은 병력 14,000명을 마오리 전쟁에 투입시켰다. 영국은 그 당시 본국에 남아 있는 병력보다 더 많은 군대를 마오리 전쟁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영국이 호주를 포함한 남태평양 지역에 대한 침략적 전략에 있어서 뉴질랜드에 대한 비중이 매우 크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어쨋든 마오리 전쟁은 12년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전쟁으로 인한 마오리 부족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마오리족이 AD 700-800년대에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1800년대 까지 1000년 을 살았는데 정착 당시 마오리족의 인구는 약 40만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영국과 마오리 전쟁을 12년 동안 치른 후인 1872년경에 이르러서 마오리족의 인구 수는 겨우 4만명에 불과했다. 마오리족의 인구가 4만명으로 격감했을 뿐만 아니라 12년간의 전쟁 후에 마오리족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그 이전의 1/6에 불과 했다고 한다. 뉴질랜드 토지의 거의 전부를 영국이 탈취했던 것이다.

영국군 병력 14,000명이 마오리 전쟁에 투입되여 12년간 싸운 결과는 무엇인가? 마오리족은 땅을 모두 빼았겼으며 최소한 36만명의 마오리족이 죽임을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인들은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원주민들을 사냥감으로 여겨 닥치는 대로 원주민들을 취미로 살해했다고 한다. 마오리 전쟁 이후 약 200년이 지난 2009년 현재에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마오리족의 후손들의 인구는 약 50만명이다. 마오리 전쟁으로 인하여 4만명으로 극감했던 마오리족은 200년 후에야 전쟁이전 수준을 넘긴 것이다.

현재 뉴질랜드 인구는 약 4,200,000명 이며 절대 다수가 영국계 백인들이다. 그 중에서 겨우 13%가 마오리족의 후손들이며 그들은 ‘제3등 국민’으로 빈곤 속에 살아 가고 있다.

마오리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둔 영국인들은 뉴질랜드의 식민지 종주국의 영국인이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영국인들은 당당한 뉴질랜드 백인의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영국인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AD 700년 이래 1000여년 동안 뉴질랜드 땅의 주인으로서 그 땅을 지켜온 마오리 원주민들은 이제는 영국의 백인들이 점령한 뉴질랜드에서 불청객 손님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국인들이 “식민지 정부”라고 하는 명칭을 없애 버리고 이제는 명실공히 뉴질랜드를 통치하는 백인을 위한 백인의 독립국이 된 것을 과시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1907년에 영국으로부터 자치국으로 승인을 받았다. 1947년에는 뉴질랜드가 영국의 연방국으로 독립을 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영국 여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모시는 영연방 입헌군주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3. 뉴질랜드 역사는 마오리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는다.

세계의 관광객들은 뉴질랜드를 <지상 최고의 낙원> 이라고 극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각종 명승지와 명품들이 가득하여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나라라고 뉴질랜드를 평가하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마오리 전쟁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이 박물관에는 옛날옛적 미개한 섬나라 원주민들이 그 당시 남태평양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발견해 낸 고대의 기구들과 신기한 고대 문화의 흔적들 만을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백인들이 배를 타고 이주해 온 해양문화가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관광객들의 입장료를 챙기기 위하여 백인들이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목적이다. 명칭이 <전쟁 박물관>이지 이 박물관은 <마오리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는다. 12년간의 “마오리 전쟁” 전쟁으로 36만명이 살해된 비극에 대한 흔적은 이 박물관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뉴질랜드는 남섬과 북섬 두개의 큰 섬으로 국토를 이루고 있는데 조선반도(한반도) 전체의 약 1.3배인데, 영국보다 약간 큰 영토를 가지고 있다. 뉴질랜드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틈새에 끼어 절대적 우호국으로서 번영하여 서구 문명을 과시하면서 번영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이다.

영국인들은 “타라나키 토지전쟁” 즉 “마오리 전쟁”에 승리하여 그 당시 130만 에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타라나키 지방에서 갈취하고 그곳에 양을 방목하고 목재를 벌목하며 석탄을 채굴하여 부를 축적했다. 종교는 절대적으로 기독교 국가이며 그 중에서 영국 성공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대하여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는 돌고 돌아 가해자만 기억해 줄 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놀라운 이변이 발생했다. 가해자의 승리만을 찬양하는 몸서리 치는 뉴질랜드의 냉혹한 역사에 대항하여 <마오리족의 복수> 라고 하는 걸작 영화가 1983년에 창작, 발표된 것이다.

2008년에 CNN이 선정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로 <마오리족의 복수>(1983)가 선정되어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마오리족의 복수> 영화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마오리족인 청년 테 웨케가 영국의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영국의 신민지 통치하에서 영국의 군인이 된 것은 일종의 특권으로 알고 테 웨케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복무 중에 영국군이 마오리 민중을 몰살시키는 장면을 보게 된 웨케는 양심적 의분을 일으키게 된다. 테 웨케는 비밀로 마오리족 의병을 조직했다. 마오리족 의병은 영국군의 무기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테 웨케가 조직한 의병대는 백인들을 죽임으로 복수를 한다. 영화 감독인 제프 머피(Geoff Murphy)가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장면은 마오리족 의병대가 영국인 목사를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실질적으로 영국이 잔인하게 마오리족을 멸종시키려는 작전에 대항하여 마오리족이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감동적인 영화이다. <마오리족의 복수> 영화는 마오리족의 복수심을 나타내지만 잔인하지 않고, 용맹스럽지만 무모하지 않으며, 지키려할 뿐 빼앗으려 하지 않는 품성을 그려준다. <마오리족의 복수>는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풍경속에서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을 탈피하였으며 예상치 못한 피해자 마오리족의 눈물을 씻어 주는 탁월한 작품이다.


글을 맺으며

미국은 2011년 5월 2일 빈 라덴이 미국의 특수부대에 의하여 살해됐다고 발표했다. 뉴질랜드의 무소속 국회의원이며 마오리족의 정치가 호네 하라위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오리족의 전통이다. 그럼으로 나는 마오리족 문화의 전통에 따라 죽임을 당한 빈 라덴에게 경의를 표한다> 라고 말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뉴질랜드의 친영국 친미국 정권의 존 키 총리는 즉각적으로 빈 라덴의 죽음을 환영한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동조하여 발표를 했다. 뉴질랜드는 역대 친서방 국가이며 이에 반하여 마오리족 원주민 정치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다른 점은 어찌 빈 라덴의 죽음에 대한 것 뿐이겠는가?

마오리족 정치인들의 관점에서 빈 라덴은 자유의 투사이며 자기 부족의 자주와 독립을 추구했던 진실한 애족애민의 사람이다.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는데 앞장서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영국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련데 마오리 전쟁으로 인하여 마오리족이 36만명이나 대량 학살을 당했으며 또 영국이 마오리족의 땅을 갈취하여 오늘의 지상락원이라고 과시하고 있는 뉴질랜드 국가를 창건한 것이다. 오늘의 뉴질랜드는 명실 공히 기독교 국가이며 또한 영국과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른바 “비핵주의 국가” 임을 자처하면서 세계평화 애호국임을 크게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역사 깊은 뉴질랜드의 기독교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오죽하면 제프 머피 감독이 <마오리족의 복수>라고 하는 영화를 제작했으며 또 CNN은 이 영화를 2008년에 아시아 최고의 영화로까지 선정을 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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