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23년 12월 17일 영화 "서울의 봄" 관람(Auckland Albany Mall) 후기.

Digital 삶의 현장/Digital 일상철

by Digitalnz 2023. 12. 18. 04:32

본문

2023년 12월 17일 영화 "서울의 봄" 관람(Auckland Albany Mall) 후기.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리고 있었다. 영화는 누가봐도 2시간 20분이 금세 지나갈 정도로 긴박감을 잘 살려줬다.


사태 당시 나는 고국 서울에서 대학 1년생(79학번)으로 그 시대를 지켜봤고, 바로 반란사태 이후 2년여 ROTC 교육과정(21기) 이수후 소위로 임관하여 임지에서 본 쿠테타에 가담했던 일부 정치군인들을 상관으로 모셨던 적도 있었기에 영화내용이 그렇게 낯설지는 안했다.

큰 줄거리 내용은 평소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전두환이 거사일을 12월 12일로 육사동기 노태우와 결정하고 군 사조직 하나회 협조아래 실행하게 된다.

특히, 전 두환 보안사가 진압군측 일거수 일투족을 유선 감청(당시 휴대폰과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통해서 장악함으로서 쿠테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용이다.


특히, 사태 당시 신현확(총리), 노재현(국방), 윤성민(국방차관)과 예하부대 지휘 부하을 장악하지 못한  장태완(갑종, 수방), 정병주(육사, 특전) 등을 지켜봐서 이미 잘 알고 관람을 했지만 상기 정부측 3명(신현확, 노재현, 윤성민)은 무능함을 넘어서 저런 사람들이 당시 대한민국 관리였다는 것이 창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 윤 성민은 육군 참모차장으로 진압군을 지휘했으나 반란군에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하다 진압에 실패했다.

유화적인 것이 아니고 나중에는 전두환 일당에 체포되어 끌려온 국방장관과 함께 반란군에 협조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이런 무능하고 무책임한 관리들이 있었기에 전두환이 쿠테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이후 이 공로로 이 자는 살펴보니 전두환(제5공화국)에 의해 국방(23대), 합동참모의장(17대),야전사령관(제1)을 창피스러운줄도 모르고 역임하고 오늘까지 천수(현재 91세)를 앞두고 잘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반란에 가담한 하나회 소속 장교들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알고있듯이 쿠테타 성공후 부와 명예를 안고 살아오고 있다.

아무튼 사태 이후 5.18까지로 이어지게 되는데, 나는 대학 79학번으로  5.18이전 서울역 대학생 연합 서울역 데모 합열에 딱 한번 참석을 했던적이 있다.

특히, 대학 2학년은 휴교령으로 레포트로 과목을 이수했고 3,4학년은 ROTC 과정(21기) 이수로 군사정권에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대학생활을 마무리했다.

대학 졸업후 초급 장교로 임관해서 아무튼 주동세력들과 함께 조국의 최전방 1사단에서 GOP(백두 OP, 장단반도 초원소대) 철책소대장과 임진강 강변(우씨묘) 해안소대장을 마쳤다.

이후 복무연장을 통해서 수방사(이종구), 12사단, 미8군을 거쳤는데 군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4년여 군생활로 만족하고 접었다.

그리고 다시 사회 초년생(LG)으로 출발해서 사회생활하다가 뉴질랜드 이주후 당시 사실에 입각한 상황을 오늘 오클랜드에서 영화로 회상하니 감회가 남다른 것도 사실이다.

특히, 본 알바니몰 영화관은 집에서 차로 15분여 거리임에도 처음이었는데 시설도 편하고 너무 좋았다. 영화 관람마치고 집사람과 집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 11시가 조금 넘어갔다.

그러나 전두환이 쿠테타 성공후 파티에서 "방랑시인 김삿갓" 열창하며 좋아하는 모습과 보안사 서빙고 지하철장에 갇혀있는 정승화, 장태환 등과 대비되는 마지막 장면등이 떠올라 뒷맛도 쓸쓸하고 해서 집사람이 준비해서 썰어놓고 냉장고에 두고간 횟감(카와이) 한 접시에 와인 한병 비우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12·12 군사반란(자료출처 : 다음백과)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주동하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이 일련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9사단장 노태우를 비롯하여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이다.

한편, 정승화 총장의 신변안전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裁可)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고, 그 외에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은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그 후로 12ㆍ12사태의 진상은 비밀로 묻혀 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사실규명에 나서 사법적 심판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되고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ㆍ노태우는 구속된다. 그 후 김영삼정부는 전두환ㆍ노태우를 특별 사면한다.

관련글 더보기